fact 추적

' 유다인의 왕 예수 '

조디 개럿 2020. 11. 9. 02:11

 

 

καὶ ἐπέθηκαν ἐπάνω τῆς κεφαλῆς αὐτοῦ τὴν αἰτίαν αὐτοῦ γεγραμμένην·  
ΟΥΤΟΣ ΕΣΤΙΝ ΙΗΣΟΥΣ Ο ΒΑΣΙΛΕΥΣ Ο ΙΟΥΔΑΙΩΝ

- 또한 그분의 머리방향에, '이자는 왕이며 유다사람인 예수이다' 라고 혐의들을 적시하였다. 

<ΚΑΤΑ ΜΑΘΘΑΙΟΝ 27:37>

 

 

성경 마태복음을 읽으며 마치 그당시 상황의 현장에 와있는듯, 가장 리얼리티가 극대화된부분이라고 할만한 구절이다. ΟΥΤΟΣ ΕΣΤΙΝ ΙΗΣΟΥΣ Ο ΒΑΣΙΛΕΥΣ Ο ΙΟΥΔΑΙΩΝ. 다른 문장과는 다르게 해당구절은 전부 대문자로 적혀있는데, 이는 마태가 예수님의 사형집행순간에 글자가새겨진 목판이나 표지판에 적힌 그대로를 성경에 적은것이라고 할수있겠다. 이를통해 당시의 시대상에서 중요한 공문서나 판결의 조목같은 대중에게 공개할때는 대문자로 표기하며(현재의 영미권 언어또한 그렇다) 아마도 이를 적은 당시 로마군인의 심경을 옅볼수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공동번역의 기준으로는 해당구절을 '유다인의 왕 예수'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우선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ἐστίν(ΕΣΤΙΝ)이 문장의 주어옆에 떡하니 붙어있다. 그렇기에 해당문장은 당연히 ~이다로 끝나는것이 맞다. 또한 ο βασιλεὺς(바실레이스)와 ο Ἰουδαίων(유다이온)의 사이에는 아무런 접속사나 전치사가 없다. 그렇기에 '유다의 왕'이라기보다는 ① 왕이며 ② 유다사람 이라는 서술어로써 앞에있는 예수님(ΙΗΣΟΥΣ)을 문장의 구조상 수식한다고 할수있겠다.

 

 

본래 로마군인이 저러한 죄목을 적시한것은 역사적으로 비추어보았을때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헤롯을 비꼬는것일수 있다. 당시 유다지역은 조선왕조로 따지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시기로써 총독 이토 히로부미가 실세로 군림하며 일본에의해 모든 정치력을 잃고 식민지배를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유다에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군림하고있었고 유다왕 헤롯은 로마군에의해 '찌질이'취급이나 받는 병신으로 대접받았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죄목을 적시할때 예수님을 총독이나 집정관같은 단어가 아닌 '왕'이라고 한것은 명백히 현존하는 헤롯왕에대한 조롱이 될수있기때문이다. 즉, 로마군관의 일종의 유머러스한 조롱으로써 옷차림도 허술하고, 직업도 세상적으로 변변찮고 초라한 예수님을 '이자가 유다의 왕이다'라고 하는것은 쉽게말해 조선인 거지나 각설이를 붙잡아놓고 일본군이 '이자가 바로 고종황제다' 혹은 여자 거지를 붙잡고는 '이여자가 바로 명성황후임 ㅋㅋ'라고 써붙이는것과 같은 모욕이라는것이다.

 

두번째로 헤롯왕뿐만아니라 헤롯왕에게 붙어먹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같은 종교인에대한 로마군의 모욕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부패한 종교권력이 헤롯왕같은 독재자에게 빌붙어 온갖 이권이나 국책사업에 개입하는 헤롯왕의 어용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초라하고 세상적으로 볼품없는 예수라는자는 그들에게 '장관자리'나 '복지예산'같은 굵직한 세상권세를 제공해줄수 없기때문이다. 이는 마치 일본군이 윤봉길,이봉창 열사를 붙잡아놓고는 친일매국노 조선 개독교인들을 향해 '너희들을 배불리 먹일 건국대통령, 너희들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여기있다'라고 조롱하는꼴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다인의 왕 예수'라는 단어자체가 겉으로 보기에는 헤롯왕과 부패한 종교권력을향한 로마군인의 조롱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는것이다. 이를통해 또한 일개 로마군인이 아무리 실권이 없다지만, 헤롯왕을 조롱한다는것은 왕에게 겁먹지않는다는것으로 일본군 검객들이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면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않은것과 비슷하다고 할수있겠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시대적 배경에의한 해석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마태가 단순히 식민지배상황의 유다왕국을 리얼하게 설명하기위해 '유다인의 왕 예수'라는 구절을 대문자 그대로 적어놓았을까? 물론, 예수님의 사형집행순간에 적시된 혐의점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을수도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작성했을때는 그당시 시점보다 몇십년 뒤의 일이다. 단순 식민지배상황을 표현하는것이면 냉정한 마태의 성격상 굳이 적시하지않을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시점에는 뭔가 특이하고 인상적이었던것이, 수십년이 지나고 다른의미로 깊게 다가와서 대문자를 사실그대로적으며(앞서 언급했듯 역사적으로는 리얼리티를 살리는 효과가 있지만, 마태복음이라는 성경 자체만 놓고보면 문장 전체가 대문자라는것은 강조할만한 문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않았을까?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보자. 앞서 말했듯이 해당 문구(ΟΥΤΟΣ ΕΣΤΙΝ ΙΗΣΟΥΣ Ο ΒΑΣΙΛΕΥΣ Ο ΙΟΥΔΑΙΩΝ)는 공동번역은 '유다인의 왕 예수'라고 번역했으나, 실제로는 '이자는 왕이며 유다사람인 예수이다'가 원문을 살린 직역이라고 언급한바있다. 이는 다시한번 말하지만,

 

 

① 예수님은 유다 사람이다.

 

② 예수님은 왕이시다.

 

 

라는 두가지의 뜻이있다고 앞서 언급한바있다. 이부분을 한번 생각해보자. 먼저 ①번구절을 놓고 생각해보면, 비록 성령으로 잉태하셨으나 모친이었던 마리아의 뱃속에 계셨으며, 오랜기간 유다국적을 유지하셨기에 예수님은 틀림없이 유다 국적을 가진 유다사람이 맞다. 이부분은 예수님에대한 신성모독이나 이런것이 될수없는 성경에 적시된 fact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②번 구절또한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은 왕이 맞다. 우선 마태복음의 시작부분인 2장1절에서 동방박사들이 유다의 왕으로 인정했으며, 마태복음의 끝부분인 28장 18절에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권한을 받으셨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당 구절을 적시한사람은 로마군인일것이다. 조롱의 의미였든지 혹은 단순한 재미를위해서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결과만 놓고보면 예수님에대해 제대로 실체를 알아차린 선지자라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또한가지 재미있는부분이 있다. 해당구절을 예수님의 사형판결을위한 혐의점을 나열할때 적었다는것이다 이를 바꾸어말하면,

 

 

 

① 예수님은 유다 사람이시며

 

② 예수님은 왕이시기에

 

 

-> 사형판결을 받으셨다는 뜻으로 해석될수도 있다는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① 예수님이 만일 유다가 아닌 어린시절 피신을갔던 이집트나 독일, 고구려, 중국국적의 사람이었다면 죽지 않으셨을것이고, ② 예수님께서 이땅에 왕으로 오시지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지않고 평범한 의인이나 단순 성인군자로 나셨다면 사형판결을 받지 않으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수있다. 즉, 바리새인들이 득실대는 유다보다 차라리 하다못해 해당 문구를 적시한 로마군인의 나라인 로마에 태어나셨다면 그리 허망하게 억울한 판결로 가시지않으셨을것이고 또한 하느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자 왕으로 나셨기에 비교적 젊은나이에 하느님과 원수진 개독들의 집중타겟이되어 그리도 억울한 사형판결로 죽임을 당하셨다는것이다. 

 

이는, 마태복음의 굵직한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하는부분이다. 해당 로마군인이 성령의 감화를 받았든 아님, 어쩌다 얻어걸려서 저런 문구를 적었든 참으로 인상적으로 와닿는 귀한 메시지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마태가 젊을때 인상적으로 목격한것을 수십년후에 마태복음을 작성하며 이부분을 현장감을 극대화해서 대문자로 강조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구절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것은 예수님께서는 왕이며 유다에 태어나셨다는 죄목으로 일찍 죽으셨다는것이다. 또한 태어나신지 얼마안되어 이집트로 피신가실만큼 유다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일찍죽기 딱좋은 환경'이자 왕으로 오셨기에 '핍박받기 최적의 여건'이라는 최악의 최악인 상황이 주어지셨다는것이다. 그럼에도 좌절하시지도 않으셨고, 하느님 아버지를 원망조차 하지않으셨다. 예수님같은 전능하신분도 수많은 핍박을 겪고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하물며 우리같은 평범한 하느님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핍박이 예수님에 비하면 얼마나 먼지같이 하찮은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여건이 예수님에비하면 얼마나 진수성찬의 금수저같은 유리함인가? 우리가 받는 핍박이 어디 예수님에비하면 핍박이라 할수 있겠는가?

 

 

원래 하느님의 귀하고 사랑받는 자녀로 태어났다면 핍박이란 그것에 비례해서 존재하기마련이다. 살아도 예수님보다 오래살면 만족함을 알고, 누군가의 무고로인해 사형판결이라도 받는것이 아니라면 크게 호들갑을 떨것도 없다. 억울하고 원통한게 세상이고 그런곳에서 최악의 최악이 겹친 여건속에 예수님도 살다 가셨기때문이다.

 

 

 

'여우도 굴이있고, 하늘의 새들도 제각기 머물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세상에 머리둘곳 조차 없다.' 

<마태오의 복음서 8:20>

 

 

(세계 최악의 무법 국가이자, 개독교와 악마가 뿌린 악마의 종자 가라지 장애충들이 득세하는 헬조선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는지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수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큰 자녀일수록 그에 비례하여 세상에서는 그만큼의 핍박과 악조건의 환경이 조성되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