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가는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전부 기득권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에 찌든 민족들이다)
어둠속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오의 복음서 4:14~16 -
해당구절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수님께서 오시기전에 미리 예수님을 알게되어 은연중에 언급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둠이라는 긴 터널에 있는 백성들이 어느순간 빛을 보고, 아무런 삶의 의욕도없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사는 그늘진땅에 희망의 빛이 비춘다'는것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빛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 마태오의 복음서 8:20-
많은 가난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월셋방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고있지만, 예수님은 아예 그런 월셋방 조차 없이 여우굴과 하늘의 새들도 마땅히 누려야할 보금자리를 누리시지못해 머리 둘곳조차 없이 사셨다.
이것이 즈불룬과 납달리, 요르단과 갈릴래아 그리고 비정규직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빛이되신게 아니면 무엇인가? 세상의 많은 기득권과 언론들은 마치 세상에서 권세있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합격하지못하고 낮은 일자리를 전전하는자들을 패배자로 보듯 멸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구지인양은 어떤가? 설날에 많은 친지들이 모여있는데 나이는 마흔이 넘어서 시멘트 공장의 비정규직으로 150만원 남짓 받아가며 일하다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그나마도 직장을 잃은 박덕규(가명)라는 남자가 있다고 치자. 덕규는 명절을 맞이해 1년여만에 보고싶은 숙모와 삼촌 할머니를 만나러 한우세트를 금색 보자기에 싸서 고향으로 향했다.
덕규의 사촌동생 A,B,C는 전부 굴지의 대기업을 다니는데 또다른 사촌 D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계속 7급공무원 시험에 낙방하여 친척 어른들 모여있는 자리에서 기가 죽어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벨누르는 소리가났고 덕규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촌 D의 표정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구세주가 온것이다.
덕규는 어른들께 큰 절을 하며 웃으며 사촌동생 D를 위로하며 말했다. '나같은 놈도 사는데 너는 충분히 잘할수 있어!'
맞는말이다. 힘들게 사는이에게는 더욱 힘들게 살면서도 굳건히 버티며 인내하는 이를보고 희망이 생기는법이다. 희망이란 곧 빛이다. 예수님께서 빛이라면 구지인양도 빛이다.
필자는 구지인양을보면 많은부분에서 회복이 된다. 사회에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불공정한 세상에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구지인양을 보면 그래도 한줄기 희망과 빛이 보이는것같다.
예수님이 희망이듯 구지인양도 희망이다. 그녀가 언제 단 한번이라도 세상에서 갑의 위치에 서본일이 있던가? 출신부터 한국사회의 납달리,요르단,사마리아 취급받는 호남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자식을 죽일만큼 사이코패스이고 그렇다고 학교에서도 밝게 살지도않고 항상 납달리, 요르단백성처럼 어두웠다.
그래도 구지인양에게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안식처. 누구에게도 말못할 속상한일들이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불공정하고 부당한 삶의 고난들을 신천지 교회의 구역장에게 털어놓았고 꽉 막힌듯한 가슴이 그나마도 신천지에 출석하는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구지인양에게 있어 빛과 희망이지 예수님의 역할을 해준이가 누구인가? 구지인양이 속한 교회의 구역장은 또한 어떤가? 여기에 있는 모든이들가운데 가장 헐벗고 핍박받는이에게 해준것이 곧 하느님께 해준것이라는 말씀대로 힘들게 살아온 구지인양에게 소속된 구역장은 희망이 되어주었다.
혹자는 신천지의 청년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종교에 지나치게 몰두하는것에 비난아닌 비난을 하곤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되었다. 대학을 마치는것보다 그 사람이 힐링을 하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전세계적으로 대졸은 커녕 고졸조차 크게 희박하며 심지어 OECD국가들중 대학을 온전히 졸업하는 국가의 수도 몇 되지않는다.
또한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지못하면 먹고살길과 취업이 막히니 걱정을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는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수 있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6:25~27-
구지인양이 어떻게 살아간들 그녀의 목숨의 시간은 정해져있었다.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해도 몇달안에 죽을수도있고 큰병으로 일을 그르칠수도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마태오의 복음서 26:39-
구지인양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실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조차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명과 운명을 거스리지 못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왜 대학을 가고 대기업에 가는것만이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세상에 살면서 그러한 일보다 더욱 가치있는일들은 사방천지에 널리고도 널렸다.
고난과 핍박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것이다. 하느님께서 고난이라는 벌주와 핍박이라는 독주를 내려주신것을 그 누구도(심지어 예수님이라고 해도) 피할수가 없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독이든 술잔을 거절하며 물릴수있는 존재는 전 우주에도 존재하지않는다.
구지인양이 만약 현실과 타협하여 대학에 복학하고 신천지를 떠났다면 그 수명이 늘어나서 지금 이시간에도 존재하고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녀가 대학에서 남자도 만나고 돈많은 신랑감을 얻어서 팔자를 고칠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된다면 즈불룬과 납달리같은 비정규직의 핍박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온데간데 둘곳이 없기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흔남짓한 짧은 생을 머리둘곳없이 사셨고, 구지인양과 거지 나사로또한 세상권세라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여 후대를 살고있는 우리가 쉽게 낙담하거나 울며 넘어질지언정 곧바로 다시 일어서 고난과 핍박이라는 이름의 험산준령을 넘고 또 넘는다.
어찌보면 구지인양이 마신것은 독주가 아니라 희망과 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광의 단 포도주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삶에대한 진지하고 불의에 타협없는 방식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 몸은 죽일지언정 그녀의 영혼에는 미세한 먼지자국조차 세상권세따위는 내지못한다는것을 당당히 입증했기때문이다. 필자는 그녀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예수님과 핍박받은 예언자들과 거지 나사로와 지금 시간에도 핍박받는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만들어놓은 험산준령의 정복 코스를 따라 발자취를 남길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후대에 빛과 희망의 개척자이자 불멸의 정복자가 될것이다.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가는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전부 기득권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에 찌든 민족들이다)
어둠속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오의 복음서 4:14~16 -
해당구절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수님께서 오시기전에 미리 예수님을 알게되어 은연중에 언급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둠이라는 긴 터널에 있는 백성들이 어느순간 빛을 보고, 아무런 삶의 의욕도없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사는 그늘진땅에 희망의 빛이 비춘다'는것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빛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 마태오의 복음서 8:20-
많은 가난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월셋방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고있지만, 예수님은 아예 그런 월셋방 조차 없이 여우굴과 하늘의 새들도 마땅히 누려야할 보금자리를 누리시지못해 머리 둘곳조차 없이 사셨다.
이것이 즈불룬과 납달리, 요르단과 갈릴래아 그리고 비정규직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빛이되신게 아니면 무엇인가? 세상의 많은 기득권과 언론들은 마치 세상에서 권세있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합격하지못하고 낮은 일자리를 전전하는자들을 패배자로 보듯 멸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구지인양은 어떤가? 설날에 많은 친지들이 모여있는데 나이는 마흔이 넘어서 시멘트 공장의 비정규직으로 150만원 남짓 받아가며 일하다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그나마도 직장을 잃은 박덕규(가명)라는 남자가 있다고 치자. 덕규는 명절을 맞이해 1년여만에 보고싶은 숙모와 삼촌 할머니를 만나러 한우세트를 금색 보자기에 싸서 고향으로 향했다.
덕규의 사촌동생 A,B,C는 전부 굴지의 대기업을 다니는데 또다른 사촌 D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계속 7급공무원 시험에 낙방하여 친척 어른들 모여있는 자리에서 기가 죽어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벨누르는 소리가났고 덕규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촌 D의 표정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구세주가 온것이다.
덕규는 어른들께 큰 절을 하며 웃으며 사촌동생 D를 위로하며 말했다. '나같은 놈도 사는데 너는 충분히 잘할수 있어!'
맞는말이다. 힘들게 사는이에게는 더욱 힘들게 살면서도 굳건히 버티며 인내하는 이를보고 희망이 생기는법이다. 희망이란 곧 빛이다. 예수님께서 빛이라면 구지인양도 빛이다.
필자는 구지인양을보면 많은부분에서 회복이 된다. 사회에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불공정한 세상에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구지인양을 보면 그래도 한줄기 희망과 빛이 보이는것같다.
예수님이 희망이듯 구지인양도 희망이다. 그녀가 언제 단 한번이라도 세상에서 갑의 위치에 서본일이 있던가? 출신부터 한국사회의 납달리,요르단,사마리아 취급받는 호남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자식을 죽일만큼 사이코패스이고 그렇다고 학교에서도 밝게 살지도않고 항상 납달리, 요르단백성처럼 어두웠다.
그래도 구지인양에게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안식처. 누구에게도 말못할 속상한일들이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불공정하고 부당한 삶의 고난들을 신천지 교회의 구역장에게 털어놓았고 꽉 막힌듯한 가슴이 그나마도 신천지에 출석하는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구지인양에게 있어 빛과 희망이지 예수님의 역할을 해준이가 누구인가? 구지인양이 속한 교회의 구역장은 또한 어떤가? 여기에 있는 모든이들가운데 가장 헐벗고 핍박받는이에게 해준것이 곧 하느님께 해준것이라는 말씀대로 힘들게 살아온 구지인양에게 소속된 구역장은 희망이 되어주었다.
혹자는 신천지의 청년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종교에 지나치게 몰두하는것에 비난아닌 비난을 하곤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되었다. 대학을 마치는것보다 그 사람이 힐링을 하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전세계적으로 대졸은 커녕 고졸조차 크게 희박하며 심지어 OECD국가들중 대학을 온전히 졸업하는 국가의 수도 몇 되지않는다.
또한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지못하면 먹고살길과 취업이 막히니 걱정을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는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수 있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6:25~27-
구지인양이 어떻게 살아간들 그녀의 목숨의 시간은 정해져있었다.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해도 몇달안에 죽을수도있고 큰병으로 일을 그르칠수도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마태오의 복음서 26:39-
구지인양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실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조차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명과 운명을 거스리지 못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왜 대학을 가고 대기업에 가는것만이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세상에 살면서 그러한 일보다 더욱 가치있는일들은 사방천지에 널리고도 널렸다.
고난과 핍박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것이다. 하느님께서 고난이라는 벌주와 핍박이라는 독주를 내려주신것을 그 누구도(심지어 예수님이라고 해도) 피할수가 없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독이든 술잔을 거절하며 물릴수있는 존재는 전 우주에도 존재하지않는다.
구지인양이 만약 현실과 타협하여 대학에 복학하고 신천지를 떠났다면 그 수명이 늘어나서 지금 이시간에도 존재하고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녀가 대학에서 남자도 만나고 돈많은 신랑감을 얻어서 팔자를 고칠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된다면 즈불룬과 납달리같은 비정규직의 핍박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온데간데 둘곳이 없기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흔남짓한 짧은 생을 머리둘곳없이 사셨고, 구지인양과 거지 나사로또한 세상권세라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여 후대를 살고있는 우리가 쉽게 낙담하거나 울며 넘어질지언정 곧바로 다시 일어서 고난과 핍박이라는 이름의 험산준령을 넘고 또 넘는다.
어찌보면 구지인양이 마신것은 독주가 아니라 희망과 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광의 단 포도주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삶에대한 진지하고 불의에 타협없는 방식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 몸은 죽일지언정 그녀의 영혼에는 미세한 먼지자국조차 세상권세따위는 내지못한다는것을 당당히 입증했기때문이다. 필자는 그녀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예수님과 핍박받은 예언자들과 거지 나사로와 지금 시간에도 핍박받는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만들어놓은 험산준령의 정복 코스를 따라 발자취를 남길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후대에 빛과 희망의 개척자이자 불멸의 정복자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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